[공지] 정혜결사문   2011-02-05 (토)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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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원문-독음-번역문.


아래의 글은 지눌(知訥)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의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다. 이 글의 내용은 당시 출가 수행승들이 수행은 하지 않고 세속적인 타락에 빠져있는 있는 것을 개탄하고, 나아가서 불가의 본분인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닦아나가자고 호소한 글이다. 이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불교의 병폐를 파헤친 것 같아 출가자나 재가자에게 많은 경종을 울려주는 법문이라 하겠다.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에 관한 글이기 때문에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이란 글 제목인듯 하다. 번역은 시인이자 역경위원인 김원각님의 문장이다.


<1>

한마음 미혹해 번뇌 일으키면 중생

한마음 깨달아 묘용 일으키면 부처.


삼가 들으니 ‘땅에서 넘어진 사람은 땅을 짚고 일어난다’ 하였다. 땅을 떠나서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한 마음이 미혹해서 끝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사람은 중생이고, 한 마음을 깨달아서 한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사람은 부처이다. 미혹됨과 깨달음이 비록 다르지만 요는 마음이므로 마음을 떠나 부처를 찾는 것은 또한 있을 수 없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조사문에 투신하여 두루 선방을 찾아다녔는데, 불조(佛祖)께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신 문을 살펴보건대,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반연을 쉬고 마음을 고요히 비워서 밖으로 구하지 않게 함이었다. 말하자면 경에서 “만일 사람이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하기를 허공처럼 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릇 보고, 듣고, 외고, 익히는 자가 마땅히 만나기 어려운 마음을 찾아 스스로 지혜로써 관조하여 말한 것처럼 닦아간다면, 참으로 스스로가 불심을 닦고 스스로가 불도를 이루어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돌이켜 우리 무리들이 조석으로 하고 있는 행적을 보면 불법을 빙자해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꾸미고 이해 득실의 길에만 매달리며 세속적인 일에만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비록 다시 출가한들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슬프다.


삼계를 여의고자 하나 번뇌를 끊으려는 수행이 없으니 한갓 남자의 몸일뿐 대장부의 뜻이라고는 없다. 그래서 위로는 큰 도를 어기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이 없고, 가운데로는 네 가지 은혜를 저버리는 꼴이니 참으로 부끄럽다. 내가 이를 장탄식하여 온 지가 오래였다.

<2>

소임따라 인연따라 성품기르며

걸림없이 살면 실로 통쾌한 일.


나는 임인년 정월에 서울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나아갔다가, 어느 날 동학 십여인과 함께 약속하기를 “이 법회가 끝나면 응당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숨어서 함께 한마음이 되어 항상 선정을 익히고 지혜 닦기를 힘쓰며, 예불하고, 경 읽으며, 울력하는데 이르기까지 각자 소임에 따라 경영하여 인연 따라 성품을 기르며 평생을 걸림없이 살면서 멀리로는 달사와 진인의 높은 행을 따른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이런 뜻으로 말했다.


“지금은 말법(末法) 시대라 정도가 숨었는데 어찌 선정과 지혜 닦기에 힘쓰겠는가. 차라리 아미타불을 부지런히 염불하여 극락정토의 업을 닦는 것만 못하리라.”


이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은 비록 변천한다지만 사람의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다. 법도(法道)에 흥쇠가 있다고 보는 것은 삼승권학(三乘權學: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 등 삼승인을 위하여 방편으로 가르친 것)이며, 지혜 있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다. 그대들과 나는 가장 훌륭한 교법(敎法)을 만나서 보고, 듣고, 익히니 어찌 과거로부터 쌓아온 인연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경사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그런 인연을 끊어버리고 권학인(權學人:삼승의 근기를 가진 사람)으로 만족한다면 이는 선조의 뜻을 저버리고 끝내는 부처의 종자마저 끊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만다.


염불하고 독경하고 만행(萬行)을 닦는 것은 사문(沙門)으로서 항상 행하는 법이니 어찌 서로 방해가 되겠는가. 그러나 근본을 공부하지 않고 형상에 집착하여 밖에서 구한다면 지혜 있는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화엄론>에도 보면 ‘일승교문(一乘敎門:일체 중생이 성불한다는 입장에서 그 구제하는 교법이 하나뿐이고 또한 절대 진실한 법의 문)은 근본지(根本智:일체 현상은 본질에서는 차별이 없는 것을 아는 지혜)로써 성취하는 것이므로 일체지승(一切智乘:모든 존재에 관해 포괄적으로 아는 대승적인 지혜를 이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3>

道와 더불어 상응하는 자만이

지혜와 경계가 스스로 융합 .


시방세계란 곧 허공과 같아 전부가 부처의 경계가 된다.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이나 중생의 마음과 그 경계가 서로 합쳐지는 것이 마치 그림자처럼 겹쳐지는 것이니, 부처가 있고 없음의 세계를 말하지 않으며, 상법(像法:부처님 입멸후 1천 년의 정법시기가 지난 후의 1천 년 기간)이나 말법(末法)이 있음도 말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항상 부처님이 출현하며 항상 정법이라 한 것이 요의경(了義經:절대 진리를 말한 경. 一乘實敎)이고, 더러운 세계나 깨끗한 세계가 있다거나 부처님이 계시는 곳, 안 계시는 곳, 또는 상법과 말법이 있다고 말한 것은 불요의경(不了義經:진실의 세계로 유인하는 방편의 가르침. 三乘權敎)이 된다’하였다.



또 이르기를 ‘여래가 사견(邪見)에 빠진 일체 중생을 위해 출현하여 복덕의 경계에 대해 간략히 말씀했으나 실제로 여래는 나타나거나 사라짐도 없다. 오직 도(道)와 더불어 상응하는 자만이 지혜와 경계가 스스로 융합하여 여래는 출현하거나 사라진다는 소견을 내지 않는다. 단지 스스로 선정(禪定)과 관조(觀照)의 두 문에 의해 마음의 때를 다스리는 것이다.


생각이 있고 형상이 있어서 아견(我見)으로 도를 구한다면 끝내 상응하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지혜 있는 사람을 의지하여 스스로 교만함을 꺾고 공경하는 마음이 사무쳐야만 비로소 선정과 지혜의 두 문으로써 결정한다’하였다.


옛성현의 가르친 뜻이 이러한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헛되이 보내리오. 맹세코 절대 진리의 간절한 말을 따르고 방편으로 베푼 말에는 의지하지 말아라.


우리 사문들이 비록 말세에 나서 품성이 둔하고 어리석다 해서 만일 스스로 물러나서 형상에 집착하여 도를 구한다면 전부터 배워온 선정과 지혜의 묘문(妙門)은 누가 행해야 할 일인가. 행하기 어렵다 해서 버리고 닦지 않는다면 현재 익히지 않으므로 다겁을 지낸다 해도 더욱 어려움이 있을 것이며, 만일 지금 억지로라도 닦는다면 그 닦기 어려운 행도 닦고 익힌 힘 때문에 점점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4>

세속의 즐거움 오래가지 않는데

마음 닦지 않고 늙음 기다리나 .


예로부터 수도하는 자가 범부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모든 경론 중에 말세 중생에게 출세간의 도 닦기를 허락하지 않은 데가 있던가.


<원각경>에 “말세 중생이 마음에 헛된 망상을 내지 않으면 부처님은 이런 사람은 현세의 보살이다” 했고, <화엄론> 에는 “법(法)은 범부들이 미칠 경계가 아니고 보살들이 행할 일이라 한다면 이런 사람은 불지견(佛知見)을 소멸시키고 정법을 파괴할 자임을 알아야 한다”했다.


그러니 지혜 있는 자는 이런 걸 알고 부지런히 수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령 수행을 하고 깨달음이 없더라도 선종(善種)을 잃지 아니하여 오히려 내세에 좋은 인연을 쌓고 익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유심결>에는 “듣고 믿지 않는다 해도 부처가 될 씨앗의 인을 맺을 수 있고, 배우고 이루지 못했다 해도 오히려 인천(人天)의 복을 덮는다”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말법과 정법의 때가 다름을 말하지 말며, 자기 마음의 어둡고 밝음을 근심하지 말고 단지 신앙의 마음을 내어 연분을 따라 수행함으로써 정인(正因)을 맺고, 겁약한 마음을 멀리해야 한다.


마땅히 알라. 세속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고, 정법은 듣기 어려운데 어찌 하루하루 헛되이 보낼 것인가.

생각해 보면 아득한 과거부터 몸과 마음의 온갖 괴로움을 받아 아무 이익이 없었고, 현재에는 한없는 핍박을 받고 있고, 미래에 받을 괴로움 또한 끝 없으나 이를 버리고 멀리하기가 어렵구나.

그런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하물며 이 목숨의 생멸이란 무상하여 한 순간도 보전키 어려운 것이 반짝이는 불빛, 바람 앞의 등불, 흘러가는 물결, 낙조(落照) 등에도 비유하지 못할 것이다. 세월이 급하고 빨라서 늙음을 재촉하는 데도 마음을 닦지 않고 점점 죽음의 문으로만 다가가고 있구나.


<5>

밤낮으로 수행 괴로움 벗어나고

자기 허물 알아 뉘우치고 고쳐라 .


옛 동지를 생각해보면 현명한 이, 어리석은 이도 있었고, 지금도 손가락을 꼽아보니 아홉은 죽고 한 사람만 남았으나 산 사람도 이처럼 쇠약해졌는데 앞으로 얼마나 남았길래 방자한 생각을 내어 탐욕부리고, 화내고, 질투하고, 아만심과 방일로 명리를 구해 헛된 세월 보내고, 쓸데없는 말로 천하를 논하며, 계덕(戒德)도 없이 공연히 보시만 받으며, 남의 공양을 받되 아무 부끄러움도 없구나. 이런 온갖 허물이 한없고 끝없는데도 덮어버리고 애통히 여기지 말란 말이냐.


만일 지혜 있는 자라면 응당 조심하고 삼가서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고, 자기 허물을 알아 뉘우치고 고쳐서 조화로운 마음으로 밤낮 부지런히 수행해서 빨리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조(佛祖)의 성실한 말에 귀의하여 거울로 삼아서 자기 마음이 본래부터 신령하고 밝고 청정하여 번뇌의 성품이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 거기에 다시 삿된 것과 바른 것을 가려서 선택하되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말라. 그리고 마음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되 흐리멍텅해서는 안되며, 단견(斷見)을 내어서도 안되며, 공(空)과 유(有)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깨달음의 지혜가 항상 밝아서 정밀하게 청정한 행을 닦으며 큰 서원을 세워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이는 홀로 해탈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만일 세간의 갖가지 일에 얽매이거나 혹 병고의 괴로움을 받거나 또는 사마악귀(邪魔惡鬼)의 공포를 받아 몸과 마음이 불안하거든 즉시 시방 부처님 앞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을 덜어야 한다. 이때, 예불과 염불을 평등하게 행해야 하며, 업장소멸과 잡념 쉬는 것을 때를 맞추어 하라.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하거나 침묵할 때나 언제든지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은 다 인연 따라 생긴 허망한 것이어서 비어서 주체성이 없음이 마치 물거품 같고, 구름의 그림자 같으니, 칭찬하거나 헐뜯거나 시비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것이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소리와 같은 줄을 깨달아 알 것이다.


< 6 >

누락


< 7 > 

선정과 지혜 두 수행 의지해서

마음의 때 다스림 옳고도 옳다 .


사산인(史山人)이 규봉 종밀선사에게 묻기를 “마음을 닦는 법이 바로 마음을 깨닫게 합니까, 아니면 별도로 수행하는 문이 있습니까. 만약 별도로 수행하는 문이 있다면 어떻게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돈지(頓旨:수행 단계를 뛰어넘어 단번에 깨닫는 종지<宗旨>)라 할 수 있겠으며, 만약 마음을 깨달았다면 왜 신통광명을 일으키지 못합니까”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얼은 연못이 다 물임을 알지만 빛을 받아야 녹는 것처럼 범부가 곧 진리인줄 알지만 법력을 빌려 닦고 익혀야 한다. 얼음이 녹으면 흐르는 물이 되므로 물을 대고 씻는 보람이 있고, 망념이 다하면 마음이 신통하므로 비로소 신통과 광명이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을 닦는 외에는 따로 수행하는 문이 없다”하였다.


그러므로 상호(相好)나 신통에 대해서는 근심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마음을 관조하여 믿음과 견해를 참되고 바르게 가져 단(斷)이나 상(常)에 빠지지 말고 선정과 지혜의 두 수행문에 의지해서 마음의 때를 다스림이 옳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믿음과 견해가 바르지 못하면 수행하는 관행(觀行)이 다 무상에 속하여 마침내 물러나 상실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리석은 사람의 관행이요, 지혜로운 사람의 수행은 아니다.


교종에서도 관행(觀行)의 깊고 얕음과 잘되고 잘못됨을 잘 분석하여 그 뜻이 자상하건만 학인들은 오직 언어만 익히고 혹은 성인의 높은 경계로만 미루어 둔 채 안으로 자기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또한 오래 연마하지도 않고 단지 공능만 알려고 한다.


이래서 원효법사는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의 관행은 안으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모든 이치를 찾되 그 이치를 아주 세밀하게 찾다가 그만 바깥 현상계를 취하게 되기 때문에 도리어 이치를 등져서 하늘과 땅처럼 멀어진다. 이 때문에 타락하여 끝없는 생사를 받게 된다.”


< 8 > 

보살은 참되게 비추는 지혜로

모든법의 경계를 증득해 안다 .


그러나 지혜 있는 이의 관행은 이와 반대이다. 밖으로 모든 이치를 잊고 안으로 마음을 찾되 찾는 마음이 지극하므로 이치를 다 잊어버리고 취해야 할 대상도 잊어버리므로 취해야 할 마음마저 없어진다. 이때문에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를 얻게 되고 마침내 물러남이 없게 되어 도리어 머무름이 없는 열반에 머물게 된다.


또 소승의 성인은 마음이 있다고 헤아린다. 그래서 먼저 성품(性品)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너무 미세한 마음으로 마음이 아주 없어지는 경지에 들어가서 지혜도 없고 비춤도 없어서 허공의 경계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보살은 본래 성품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미세한 생각을 버리지만 마음이 아주 없다는 생각도 없이 참되게 비추는 지혜가 있어 모든 법의 경계를 증득하게 된다.’ 


이와 같이 어리석고 지혜로운 이와 소승과 대승의 관행에 대해 그 득실을 분별하여 털끝만큼도 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선종이나 교종에서 고금을 통해 관행의 의미를 바로 안 사람은 다 자기 마음을 통달하여 망상과 반연이란 본래 일어난 곳이 없다. 그래서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의 작용이 끊임이 없어서 법계를 증득해 알므로 영원히 어리석은 이와 소승과는 그 길이 다르다. 그런데도 어찌 자기 마음을 관하지 않고 진실과 허망을 분별하지 않아 깨끗한 업을 쌓지 않고 먼저 신통과 도력만을 찾는가. 마치 배를 부릴줄은 모르면서 물굽이를 원망하려는 이와 같구나.”


물었다. “만약 자기의 참 성품이 본래부터 원만히 이루어졌다면 자재롭게 자기 마음에 맡겨 두어도 옛 법에 부합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관조함으로써 노끈도 없는데 스스로 결박을 받으려 하는가.”


대답하다. “말법 시대의 사람은 꾀 많은 지혜만 많아서 고통의 굴레를 벗지 못하며 마음만 내면 곧 허망하고 거짓된 것을 받들고 말을 내면 곧 분수를 지나치고, 지견이 모자라고 메마르고, 행과 앎이 같지 않다. 요즘 선문에서 공부하는 자들은 흔히 이런 병이 많아서 ‘마음은 본래 청정해서 유무(有無)에도 속해있지 않는데 왜 몸을 수고롭게 하여 억지로 수행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말한다.


< 9 >

선정과 지혜 닦기 전념하지 않고

본성만 믿고 안주할 수 있겠는가 .


이 때문에 걸림 없고 자유로운 행만 본받고 참된 수행은 버리니, 몸과 마음이 단정치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구부려졌는데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어떤 이는 경전에서 말한 법상(法相)의 방편설에 집착하며 스스로 퇴보하는 마음을 내고, 점수(漸修)의 행에만 애를 쓴다.


그러니 성종(性宗:만법의 근원인 진실한 본성을 종지로 하는 선종을 뜻함)을 어기고 부처님이 말세 중생을 위해 열어 놓은 비밀한 말씀(오묘한 진리)을 믿지 않고 먼저 들은 것만 고집하니 이는 삼(麻)은 등에 지고 금덩이는 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자주 이런 유의 사람을 만나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그들은 믿지 않고 도리어 의심하고 비방할 뿐이었다. 다시 한번 ‘심성은 본래 깨끗하고 번뇌란 본래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의지해 수행하는 것이 어떠한가.


밖으로는 계율을 지키면서도 구속이나 집착을 잊고, 안으로는 선정(靜慮)을 닦되 억지로 생각을 눌러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른바 악을 끊되 끊으면서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되 닦으면서도 닦음이 없어야 참으로 닦고 끊음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으면서 아울러 온갖 행을 닦아 나간다면 헛되이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이나 문자만 찾는 미친 지혜에 어찌 견주겠는가.

또 참선 수행은 가장 친절한 문이다. 성품에 갖추어져 있는 무루(無漏)의 공덕을 개발해주니 만일 뜻을 내어 닦는 자는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또는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언제고 간에 생각 생각이 비고 심오하며, 마음 마음이 밝고 오묘하여 온갖 덕과 신통 광명이 이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도를 구함에 있어 어찌 선정과 지혜 닦기에 전념하지 않고 본성만 믿고 안주할 수 있겠는가.


<10 >

지혜는 법으로 空을 觀하니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것.


<익진기>에 보면 ‘선정과 지혜라는 두 말은 바로 삼학(三學:계, 정, 혜)의 준말로서 갖추어 말하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이다. 계율은 잘못을 막고 악을 고친다는 뜻이니, 삼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게 함이요, 선정은 진리에 부합하여 산란한 마음을 수습한다는 뜻이니, 여섯 가지 욕망을 뛰어넘게 함이요, 지혜는 법으로 공(空)을 관(觀)한다는 뜻이니 이는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성인은 처음 수행할때 다 이것을 배웠기 때문에 삼학이라 한다’ 하였다. 또 이 삼학은 상(相)으로 따지는 것과 성품으로 따지는 구별이 있다. 상으로 따지는 것은 위에 말한 것과 같고, 성품으로 따진다면 ‘진리에는 본래 ‘나’가 없다는 것이 계율’이고, ‘진리에는 본래 어지러움이 없다는 것이 선정’이며, ‘진리에는 본래 미혹됨이 없다는 것이 지혜’이다. 이런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삼학이다.


또 옛 스님은 ‘내 법문은 과거 부처님이 전해주신 것이지만 선정과 정진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통달하게 할 뿐이다’하였으니, 이것은 상(相)으로 따지는 이들의 삼학을 깨뜨린 것이지 성품으로 따지는 삼학을 부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계 스님이 ‘마음에 잘못이 없음이 자성(自性)의 계율이요,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며,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지혜이다’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또 말한 선에도 얕고 깊음이 있다. 말하자면 외도선, 범부선, 이승선, 대승선, 최상승선 등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선원제전집>에 실려 있는 것과 같다. 지금 말한 ‘심성은 본래 깨끗하고, 번뇌란 본래 없다’고 하는 이 이치는 바로 최상승선(가장 근기가 뛰어난 선, 즉 조사선을 뜻함)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차츰 공덕을 쌓아가는 수행의 문이 있어야 하겠기에 권승(權乘:근기가 얕은 이를 위해 방편으로 가르침)과 대치(對治:서로 대칭되는 것을 나타내어 가르침)의 뜻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권수문(勸修文)에는 방편과 절대의 진리를 아울러 말했으니 그렇게 알라.


<11 >

선정은 능히 번뇌의 화살 막으니

지혜 지키는 창고요 공덕의 복밭 .


선정과 지혜의 이름은 다르나 요는 본인의 신심이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데 있다. <지도론>에 ‘세상의 하찮은 일도 전념하지 않으면 사업을 이룰 수 없는데 하물며 위없는 도를 배우면서 선정과 지혜에 힘쓰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고 그 게송에 「선정은 금강의 갑옷이라 능히 번뇌의 화살을 막고, 선정은 지혜를 지키는 창고라서 온갖 공덕의 복밭이로다. 분주한 티끌이 하늘 해를 덮으면 큰비가 그것을 씻어주고, 망상의 바람이 마음을 흩뜨리면 선정이 그것을 없애준다」하였고, <대집경>에는 ‘선정에 든 사람이 나의 참된 아들이다’ 하고 그 게송에 「한적하고 고요한 무위(無爲)의 부처 경계여, 거기에서 깨끗한 지혜를 얻는다. 만일 선정에 머무는 이를 비방하면 여래를 비방함이다」했고, <정법염경>에는 ‘온 세계의 인명을 구제해도 잠시 마음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바르게 가지는 것만 못하다.’ 했고, 또 <기신론>에는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 나약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부처의 종자를 이어가는 것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예언을 내릴 것이다.


가령 어떤 이가 온 세계의 중생을 교화하여 열 가지 선행을 하게 해도 잠깐 이 법을 올바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못하며, 이는 앞에 말한 사람의 공덕보다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였으니 이로써 선정에 의해 수행하면 선(善)의 공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선 수행을 잘하지 못하면 업식이 아득하여 의지할 근본이 없다. 임종시에는 병고에 시달리고 육신이 무너질 때는 마음은 미친 듯이 극도의 괴로움에 휩싸이고 소견은 뒤바뀌고 어지러워 하늘에 오를 꾀도 없고 땅에 들어갈 방도도 없다. 그리하여 당황하고 두려움에 질려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형색은 매미 껍질처럼 쓸쓸해지고, 아득하고 망망한 길을 외로운 혼이 홀로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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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결사 
저의 심정을 대변한 글이 있어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