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봉암사 결사   2011-02-05 (토) 05:55
최고관리자   3,418



1. 정해년 동안거 해제를 맞으며
회고해 보니 올해는 해방 후 새로운 불교의 나갈 길을 모색하던
성철스님과 도반스님들이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고 뜻을 모아서
봉암사 결사를 실행한 지 꼭 60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봉암사 결사에 대해서는 최근에 와서야 김광식 교수 등이
불교 현대사 연구차원에서 논문을 쓴 것이 전부인 듯하다.
기억 속으로, 세월 속으로 사라져 가는 단편들을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겨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봉암사 결사의 의의를 살벼볼 수 있으면
새로운 것보다 이미 여기저기 있는 기록들을 모아서
사부대중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성철스님과 향곡스님의 법담은 우리 사부대중게게
훌륭한 귀감이 될 것이며
해제를 맞이하는 대중스님에게도 일대사인연을 해결하는 데
큰 신심을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 줄탁동시라는 경청스님의 법문이 있다.
‘줄’이란 병아리가 달걀 안에서 나오려고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말하고,
‘탁’이란 병아리가 달걀 안에서 나오려고 껍질을 쪼아댈 적에
어미닭이 때맞춰 밖에서 껍질을 쪼아주어 병아리가 성공적으로
부화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도반스님들의 탁마야말로 선방의 훌륭한 가풍이라고 생각한다. 
올 해제에도 도반 스님들이 서로 의지하여 줄탁동시의 선기를 닦아서
무량중생들을 제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2. 봉암사의 내력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에 소재하고 있는 봉암사는
신라 49대 헌강왕 때인 897년 지중 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최치원 선생이 찬술한 지중 대사 적조탑 비문에 실린 봉암사 창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심이 깊은 심층이란 신도가 있었는데,
지증 국사의 높은 도명을 듣고 찾아가 뵙고 사뢰였다.
“제자에게 여분의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 봉암계곡에 있습니다.

경계가 눈 가는 데까지 다 포함하오니
바라건대 절을 지으십시오!“
지증 국사가 천천히 대답하였다.
“나는 분신을 할 수 없으니 어찌 이를 수용하리오?”

하지만 심층의 요청은 계속되었다.
심층은 희양산이 갑옷 입은 기병을 선봉으로 삼은
신이로운 형상이라고 하였다.
[군을 지휘하는 갑옷을 입은 군사가 말을 타고 달리는
이 기이한 모양의 산세이므로 기백이 있고
웅장한 명산이라는 밀이다.]
이에 지중국사가 희양산에 도착하여 육환장을 짚고
나무꾼들이 다니는 길을 따라가며 산세를 두루 살펴보았다.
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 있어서
붕새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여,
뿔 없는 용이 허리로 돌을 덮은 것과 같다.

지중국사가 경악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명산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황건적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드디어 대중을 솔선하여 후환을 막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기와집을 짓고 사방으로 추녀를 드리워 지세를 누르고
철불상 2구를 주조하여 위호하였다.
헌강환 7년(881)에 사액을 내리기를 ‘봉암’이라 하였다.
지증대사가 가서 교화한 몇 년 만에 과연 산 속에서
화전을 일구어 먹고사는 농민들이 산적이 되어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처음에는 산적이 난폭하게 행동하며 법륜에 항거하였으나,
마침내 스님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어 법력으로 진정하였다.

이렇게 신라 말에 지중 대사가 봉암사를 개선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가 되고
극락전만 남으나 고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 때는
봉암사는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뉘어 정진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는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고 한다.

조선조 세종대왕 때 함허당 기화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를 저술하였다.
1674년 소실전 절을 신화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 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사세가 쇠퇴하였다.

유서 깊은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 부흥한 것은
1947년 가을 봉암사 결사 이후다.
1962년 향곡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들이 정진했다.
1974년에 잠시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으신 것을 제외하고는
1976년까지 향곡스님이 조실역할을 맡으셨다.
1980년 서암 큰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져
1994년 종립선원으로 지정되었다.

3. 봉암사 결사
다음은 봉암사 결사에 대한 성철스님의 증언이다.

봉암사에 들어간 것은 정해년, 내 나이 36세 때입니다.
봉암사에 들어가게 된 근본동기는 청담스님, 우봉스님, 자운스님, 그리고 나하고 넷인데,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이익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이런 원을 세웠습니다.
1045년 대승사 쌍련선원에서부터의 다짐이었습니다.

처음 봉암사에 들어갈 때는 우봉스님이 살림을 맡고,
보문스님하고 자운스님하고 나하고 이렇게 넷이 들어갔습니다.
청담스님은 서로 약속은 했었지만 해인사에서 가야총림 한다고
처음 시작할 때는 못 들어오고, 그 뒤를 향곡 월암 종수,
젊은 사람으로는 홍경 도우. 보경. 성수. 법전. 혜암 등
모두 20여 명이 되었고 살기는 한 3년 살았습니다.


청담 스님은 이듬해 봄에 봉암사 결사에 참가하여
봉암사 결사가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다.
대중이 모여서 선원 생활을 하니 자연히 규칙이 필요해서
대중스님의 동의를 얻어서 성철스님이 ‘공주규약’을 만들었다.

첫째,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구경의 큰 결과를 원만히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둘째,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각자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셋째,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주자치의 표지 아래에서 물 기르고,
땔나무 하고, 밭에 씨 뿌리고, 또 탁발하는 등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중략)…
여섯째,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일곱째, 방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고 서로 잡담을 금한다.
…(하략)…

대중스님들은 이런 엄한 청규 속에 살면서
일상의 예불이나 의식주 생활에서도 개혁을 시도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성철 스님의 증언을 통해 살펴보자.

첫째, 법당 정리부터 하자.
우선 법당 정리부터 먼저하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법당 정리를 하라니 무슨 소리인가?
우리 한국불교는 가만히 보면 간판을 불교 간판을 붙여 놓고 있지만,
순수한 불교가 아닙니다.
도교의 칠성단이 있고, 민속신앙인 산신각도 있고 하여
온갖 잡신들이 소복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법당에 잡신들이 들어앉을 수 없는 것이니
법당 정리부터 먼저 하자!
그리하여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외에는 전부 다 정리했습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중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습니다.

둘째, 불공 양태를 바꾸자.
불공이란 자기가 무엇이든 성심껏 하는 것이지,
중간에서 스님네가 축원해주고 목탁 치는 불공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신심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공양물을 갖다 놓고
자기가 절하라는 말입니다.
스님들은 중간에서 삯군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바리때는 와철이어야 한다.
바리때를 쇠로 하든지 질그릇으로 해야지 나무 바리때는 금하는 것입니다.

넷째, 가사는 괴색이어야 한다.
부처님 당시부터 비단이나 좋은 옷을 못 입게 하셨는데,
빨간 비단 가사는 걸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색깔은 괴색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지 화려한 색은 금물입니다.

다섯째, 공양은 사시에만 한다.
율장에는, 공양은 사시밖에 없으니까 저녁 공양은 없는데
청규에는 약석이라고 해서 참선하는데 너무 기운이 없어도 안 되므로
바리때는 펴지말고 조금씩 먹도록 되어 있고,
아침에는 죽을 먹도록 했습니다.

여섯째, 포살을 한다.
결제 중에 매 보름마다 모여 포살을 시행하였습니다.
일곱째, 신도는 스님들께 삼배해야 한다.

“당신네가 여때까지 절을 다니면서 부처님께는 절했지만.
스님네 보고 절 한 일 있나?
당신네는 제자고 스님네는 스승인데
법이 거꾸로 되어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어?
조선 500년 동안에 불교가 망하고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처님 법이 아니야!
부처님 법에는 신도는 언제나 스님네한테 세 번 절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 부처님 법대로 하려면 여기 다니고
부처님 법대로 하기 싫으면 오지 마라!
그렇다고 꼭 우리 말대로 하라 이 말도 아니야.
하기 싫은 사람은 나가! 나가도 좋단 말이여!“
했더니 한 사람도 안 나가요.
“그럼 부처님 법대로 하겠다는 말인데,
꼭 부처님 법대로 하려면 일어서서
앞에 앉은 스님들게 세 번씩 절하란 말이여.
그것이 부처님 법이니까!
억지로 하라는 것 아니야. 하기 싫은 사람은 나가!“
그랬더니 전부 일어나서는 스님들께 세 번씩 절했습니다.
신도들이 절을 다 하고 난 후에 내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법이니 어디서든지
스님들을 만나면 꼭 세 번씩 절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도가 아니야!“
신도가 스님네 보고 삼배 한 것,
근세에는 봉암사 보살계 살림에서 한 이것이 처음입니다.


이처럼 신도는 스님들께 삼배 해야 한다는 항목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자운 스님이 봉암사에서 《범망경》으로 처음 보살계를 시행한
1948년부터 비롯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음은 봉암사 결사에 대한 조계종 종정 법전예하의 증언이다.

“당시 내 나이가 24세이었지만 절에 간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가서 본 봉암사의 생활은 그 전에는 전혀 해보지 않은
판이하게 다른 절 생활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장삼도 옛날에는 두루마기에다 뭘 달아 가지고
비단 가사를 입었는데 봉암사 스님들은 보조 장삼을 입고 있었어요.
… 여기는 일도 많고 규칙도 까다롭고, 장삼도 밤에 잘 때나
대 소변 볼 때, 지게 지고 일할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입고 지내야 하는데, 그렇게 살겠느냐고 물으시더군요.
나는 어쩌든지 대중이 하는 대로 지내고 싶다고 했지요.
그래서 봉암사에 있게 되었어요.
그런 생활은 처음이었어요.
그것은 우리 선종사에만 있는 일로서, 보통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때 노장님(성철스님)께서 공부하는 제자를 다루는 것도,
앉아서 존다든가 방일한 태도가 보이면
지나가다가도 소리를 지르고 그렇지 않으면 몽둥이로 내려치셨지요.
그리고 일은 일대로 해야 하니까 도저히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 환경을 배겨 내지 못하면 가버렸어요.
밭 메러 산에 가서 나무하고, 동냥하고, 공부하고….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는 그래도 그렇게 살 사람이 있었는데,
요새 그리 한다면 아무도 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노장스님께서는 부처님 율장에는 목바루를 못 쓰게 되어 있다고 하시며
쓰고 있던 목바루를 다 망치로 때려서 불사르고 했지요.
그때까지 입고 왔던 두루마기 장삼과 비단 가사를 불살라버리고
지금 스님들이 입고 있는 괴색 가사와 보조 장삼을 입게 되었지요.,
한 마디로 불교계에 일대 혁신을 주도한 것이지요.
그것이 근간이 되어 지금 대중화가 되었다고 봐야 해요.“


4. 봉암사의 도반들

① 청담 큰스님(1902-1971)
1945년 보리가 익을 무렵 문경 대승사에는
우봉, 청담, 자운, 성철, 종수, 홍경스님 등이 주석하고 계셨다.
대승사 선방인 쌍련선원에서 정진하고 계셨는데
앞마당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하안거가 시작되어 인적이 드물고 차차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니
산방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정진하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는 청담스님께서 “철 수좌! 선방 문을 열어 놓고
앞마당에 있는 저 은행나무가 앞을 가로막아 영 속이 답답하구만.
저 은행나무가 없으면 시원할텐데….“
하고 성철스님께 말을 건네니 성철 스님도
“그러게 말이요. 나도 영 답답하네. 그럼 무슨 수를 써야제!”하시며
두 스님께서 의기투합하셨다.

창고간을 뒤져 톱 두 자루를 찾았다.
두 분 스님들께서 틈을 엿보다가 대중스님들이 바루공양하시는 동안
은행나무로 가서 한 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한 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마주하여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30대, 40대 초반의 장골들이라 은행나무가 “쿵”하며 넘어졌다.
그 사이에 두 스님은 몸을 숨기고 선원으로 얼른 숨어 들어와
좌선하는 모습으로 앉아 시치미를 떼고 계셨다.

바루공양을 막 마칠 즈음 대중이 “쿵‘하고 무너지는 소리에 놀라 나와 보니
선방 앞에 잘 생겼던 은행나무가 자빠뜨러져 있으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후 정진 내내 주지스님이 뒷짐을 지고
“말을 할 수 없지만!”하면서 자빠뜨려진 은행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한다.

“청담스님과 나는 그렇게 죽이 맞았어!”하시면서
들려주신 성철 스님의 대승사 쌍련선원에서의 생활 한 토막이다.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은 1941년 만공 큰스님을 모시고 정진한
덕숭산 정혜사에서 처음 만나 지음의 우위를 다지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1943년 복천암에서 다시 만나서 정진하게 되고
1945년 봄부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승사에서
총림 수행 공간을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하고 수업이 토론을 하고 의견을 나누셨다.
해인사에서 가야총림 운영의 건으로 의기투합하고
청담 스님께서 1948년 봄에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면서
두 분은 다시 만나셨다.
그리고 6.25사변으로 봉암사 결사가 중단될 때까지 함께 지내셨다.

청담스님께서는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던 모양이지!”하시고,
성철스님께서는 “청담스님과 나 사이에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다.”고 하셨다.
해방 공간에서 한국 불교의 중흥을 위한 수행가풍을 되찾고자 한 열정은
사부대중이 깊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② 자운 큰스님(1911-1992)
자운 큰스님은 용성 큰스님의 상좌가 되므로
성철스님에게는 사숙님이 되신다.
그러나 세수가 스님보다 한 살 위이기도 하셔서 격의없이 허물없이 지내셨다.
두 분은 금강산 마하면 선원에서 1939년 처음 만나
평생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시종여일하게 지기의 인연을 맺으셨다.
봉암사 결사 공주규약에 탁발 동냥하여 자주 자치적으로 산다고 규정하였기에
자운 스님께서 봉암사 대중을 위해서 동냥을 많이 다녀서
그 자비행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 해방 후 승풍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계율의 확립이 급선무였다.

청담.자운.향곡.성철스님 등이 모여서,
선 수행은 청담.향곡.성철 스님들이 맡고 계율은
자운스님께서 맡기로 역할을 나누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1948년 8월 자운 스님을 전계사로
7일간의 걸쳐 전국적인 보살계 수계법회를 처음 실시하고
신도들이 스님들에게 삼배를 하게 되었다.
이때 보살계를 받으려는 불자에게
천백억화신의 천화불을 상징하는 의미로 천배의 절을 하게 하였다.

1966년 문경 김용사에 계시던 성철 스님을
해인사 백련암으로 거처를 옮겨 오게 하셨다.
성철스님은 해인사방장이 되신 이후에도
자운스님에게 해인사 자웅의 대소사를 의논하셨다.
해인사 주지 임명 문제가 생기면
자운스님, 영암스님의 의견을 물으시고 세 분이 결정하셨다.
자운 큰스님께서는 자비보살의 화현이시라고
성철 스님께서는 종종 말씀하셨다
시자로서 도반 사이의 두터운 정을 나누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다.
자운 큰 스님께서는 조계종단의 전계사로서 우뚝하였다.

③ 향곡 큰스님(1912-1978)
월내 묘관음사에 있는 향곡 큰스님의 비문 일단이다.
1947년 정해년에는 희양산 봉암사에 안거하셨다.
그때 함께 있던 도반이 말하였다.
“죽은 사람을 완전히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죽은 사람을 완전히 살려 놓아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
그 말 아래 문득 무심삼매에 들어 21일 동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였으니,
가히 한 망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는 대문 앞을 지나가다 홀연히 자기의 두 손을 보고 확철대오 하였으니,
일순간에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져버렸다.
이에 스님은 오도송을 읊으셨다.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물 이 모두가 무슨 물건이었던고.
이로부터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봉암사의 한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굽이굽이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이로부터 천하 총림에 몸을 던져 사자후를 터트렸으며,
인연 속에서 뜻과 같이 자유자재로 임하셨다.

비문에는 “함께 있는 도반”이라고 하여
누구라고 지칭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 도반은 성철 스님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의 회고담에서
향곡 스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운 스님은 잘 알지만,
거기(봉암사) 들어가 살면서 내가 (향곡스님에게)편지를 냈습니다.
엽서로 우리가 사는 데 공부하러 오라!
안 오면 내가 가서 토굴에 불을 질러 버린다고.
그 편지 받고 당장 쫓아 왔어요.
이렇게 도반을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집 지키는 사람을 구해 놓고 후년 봄에 오겠다더니“


그렇게 봉암사로 오셔서 성철스님의 그와 같은 물음에
21일 동안 무심삼매에 들어 마침내 칠통을 타파하시고
견성을 하시게 된 것이다.
도반간의 줄탁동시의 탁내를 사부대중은 가슴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향곡 큰스님은 봉암사 백련암에서 21일 동안 용맹정진 하셨다고 들었다.
봉암사 결사 때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의 법거량 모습을
묘엄 스님은 《회색고무신》에서 다음과 같이 생생히 전하고 있다.

비는 여전히 억수로 쏟아지는데 봉암사 큰방 앞마당에서는
참으로 기이한 진풍경이 벌어졌다.
성철 큰스님과 향곡 큰스님이 비를 흠뻑 맞아가며
맨발로 마당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비척거리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향곡 스님이 성철 스님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당신은 문수야!”
이번에는 성철스님이 향곡스님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당신은 보현이야!”
두 큰 스님이 서로 “문수야, 보현아!”하며 비를 맞고 서 있는데
다른 대중들은 모두 처마 밑에 주르르 서서
두 큰 스님들이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묘엄도 살금살금 그 대중들 사이에 끼었다.
느닷없이 성철 큰 스님이 소리쳤다.
“구덩이 파라! 한 구덩이에 죽자!”
그러더니 무슨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성철 큰스님이 느닷없이 향곡 스님의 멱살을 틀어잡고
대문 밖에다 패대기를 쳐 버렸다.
향곡 스님은 졸지에 대문 밖에 곤두박질을 쳤다.
성철 스님은 그리고는 대문을 탁 닫아 빗장을 채워버렸다.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봉암사 대중들은
이 희한한 두 큰스님의 법거량을 숨죽인 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대문 밖에서 향곡 스님이 일어나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판자 틈으로 보였다.
향곡 스님은 ‘철컥철컥’대문을 소리나게 흔들었다.
그러나 성철스님이 빗장을 채워버렸으니
대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저 대문 좀 열어줘라.”
성철 스님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렇게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얼른 나서서 대문을 열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또 무슨 엉뚱한 불호령을 당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향곡스님은 ‘철컥 철컥’소리가 날 만큼 대문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성철스님이 갑자기 헌식돌로 쓰이는 커다란 돌을 들고
대문 앞으로 가더니 소리 안 나게 빗장을 살짝 들어둔 채
그 앞에서 두 손으로 돌을 들고 지키고 서 있었다.

향곡 스님이 또 다시 잠긴 줄로만 알고
힘껏 대문을 밀치니 왈칵 대문이 열렸다.
그 순간 성철 스님이 들고 있던 그 큰 돌을
향곡 스님의 배를 향해 던지니,
그 큰 돌이 향곡 스님의 배에 맞고
그래도 향곡스님의 발등에 떨어졌다.
참으로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중들은 모두 ‘악’소리를 낼 뻔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향곡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성큼성큼 들어와서
언제 그랬느냐 싶게 다시 성철 스님과 어깨동무를 하더니
‘하하하하’ 한바탕 크게 웃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하….”
성철 큰스님과 향곡 큰스님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봉암사 가득히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참으로 문수보살 후신이신 모양이다.
참으로 보현보살 후신이신 모양이다. ‘
봉암사 대중들은 넋을 잃고 두 큰스님의 기이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비도 그치고,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성철 큰스님과 향곡 큰 스님은 1939년 경북 은해 운부암에서
처음 만나신 이래로 평생 도반으로 우위를 굳게 나누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대중 스님들 가운데서
종정으로는 청담.성철.혜암.법전 큰스님이 나오셨고,
총무원장으로는 청담.자운.월산.성수.법전 큰스님 등이 나오셨다.
얼마전에 원로의원 큰스님께서 입적하셨는데 지관 총무원장 큰스님께서
조사를 하시는 가운데 “청담스님을 모시고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을 때
나는 원주로, 청전 스님은 미감을 맡으셨다.“고 하셨다.

불교의 현대사를 두고 볼 때 봉암사 결사는
그 결사만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셨던 스님들 가운데서
오늘 조계종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데 커다른 중추 역할을 하셨음을
우리는 더욱 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는 올해 봉암사 대중 스님들은 물론이거니와
조계종 선종의 전통성을 이어가는 데
우리가
모두 한층 분발하여야겠다.



봉암사 결사 무엇을 남겼나

 식민불교 청산하고 정화운동 이념 모태
‘부처님 근본정신 회복’ 취지로 전통불교 복원
조계종단 재건 주춧돌 놓고 대중화에도 큰 획

 <사진설명> : 봉암사 결사는 근본불교적인 불교개혁운동을 표방, 이후 전개된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됐다. 사진은 1954년 12월 전국비구.비구니대회에 참석한 스님들이 조계사 인근에서 정화의 타당성을 홍보하는 모습.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회복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봉암사 결사. 공동수행을 통한 청정불교 회복을 소리없이 외친 봉암사 결사는 6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불교 수행전통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10여명의 수좌스님들이 청정한 수행을 실천에 옮기면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칙적인 외침’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아 결사의 성립과 내용에 이어 현대적 의미를 짚어봤다.

1947년 가을 성철, 청담, 자운스님 등이 총림생활에는 도서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당시 김법룡 거사가 소장하던 도서를 봉암사로 인수하면서 시작된 봉암사 결사. 이렇게 시작된 결사는 불법에 어긋난다며 우선 불공과 천도재를 받지 않고 수좌스님 스스로 자발적인 노동을 통해서 생활하자는 방침을 정했다. 당시 봉암사 수좌스님들은 나무하고 물긷고 밭갈고 탁발하는 것을 일상화했다. 가사와 장삼, 발우 등의 개선도 시도했다. 이같은 제반규칙을 일컫는 ‘공주규약’에는 이외에도 참선수행, 포살 실시, 능엄주 암송, 자주ㆍ자치 구현, 청규와 계율의 준수 등 17개 항에 달하는 규약이 포함돼 있다.

이같은 개혁을 시도한 것은 당시 불조교법이 파괴됐다는 현실 인식에서 나왔다. 봉암사 결사에 대한 소문이 점차적으로 퍼져감에 따라 전국 각처의 수좌스님들은 봉암사에서 수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몰려들었다. 1948년 봉암사 대중은 30여명에 달했다. 청담, 성철, 자운스님을 축으로 향곡, 혜암, 월산, 성수, 법전, 우봉, 도우, 보경, 보안, 응산, 청안, 혜명, 일도, 보문, 홍경, 종수스님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결사는 재가불자에게도 급속히 번졌다. 봉암사에 밀려든 불자들을 대상으로 보살계 법회를 봉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스님-신도간 위계질서가 구축됐다. 재가자가 스님들에게 예를 표하는 삼배의례도 이 당시부터 정착됐다. 법회에서 법단 내 중단예불이 폐지됐고 〈반야심경〉 독송의례가 보편화됐다. 이는 봉암사 결사가 불교의 대중화에도 큰 획을 긋게 된 배경이다. 보살계 법회 뿐 아니라 공양물의 평등성 등도 단적인 예다.

이처럼 결사는 불교의 근본과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한 현실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가운데,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잡고 사상적 대안을 정립해 주었다.

 <사진설명> : 봉암사결사 이후 5년 만에 전국의 스님들은 ‘불교정화’를 외쳤다. 사진은 1954년 12월 정화촉진을 촉구하며 종로.중앙청 일대를 시위하는 스님들.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봉암사 결사가 갖는 의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봉암사 결사는 우선 일제 식민지 불교 잔재의 극복이라는 측면이 두드러진다. 식민지 불교 극복의 실천운동으로 정의되는 봉암사 결사는 해방공간 불교계의 역사적 과제였던 일본불교의 청산, 식민지 예속성의 단절, 한국 전통불교의 복원을 충실히 실천했다. 근본불교적인 불교 개혁운동을 표방한 결사는 따라서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됐다. 1954년부터 본격화된 불교정화 운동 추진의 정신적 기반이 됨에 따라 봉암사 결사에 동참한 대다수의 수좌스님들은 정화운동을 주도하거나 합류했다. 물론 결사의 정신이 정화운동을 추진한 중심부에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결사의 정신이 조계종단 재건과 운용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잘 알려진대로 결사에서 실행됐던 의식와 의례 규칙 등은 이후 관행화됐다. 앞서 제시한 장삼과 가사, 〈반야심경〉 독송, 삼배의례 등의 보편화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결사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난 규약과 이념, 실천 등은 조계종 승가정신사의 상징사적 의미를 제시해준다.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미완성의 결사로 소멸되고 말았다. 2년여간 전개된 결사는 1949년부터 서서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봉암사 인근에 빨치산이 출몰하면서 사찰 인근에 경찰이 자주 출입했고 급기야 수행생활에 지장은 물론 수좌스님들의 생명에 위협까지 받게했다. 끝내 1949년 9월 봉암사에 보관됐던 도서는 부산의 묘관음사로 이전됐고 대중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봉암사 결사는 이처럼 외부의 요인에 의해 좌절됐지만 수좌스님들의 투철한 현실의식, 결사의 자생성, 규약에 나타난 원칙성과 규율성, 청정성, 간화선 중심 등을 표방했다. 현대불교사에 중요한 위상을 점한 이유도 여기에 근거한다.

식민지 불교의 극복, 근본불교적인 개혁운동, 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 결사에서 시도된 의례의 지속성 등은 봉암사 결사가 한국불교에 남긴 상당히 의미있는 획으로 인식되고 있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 ‘봉암사 결사의 전개와 성격’을 주제로 한 논문에서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사의 기념비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며 “근대 식민지불교의 모순을 청산하려는 강렬한 정신과 실천에서 대두된 봉암사 결사는 이후 불교정화운동의 추진 및 조계종단 재건과 운영에 있어 기본적 준칙으로 인식되었다고 할 만하다”고 밝혔다.

조계종단 재건의 밑거름이 됐던 봉암사 결사가 비록 좌우익 갈등, 6.25 전쟁 등 민족적 비극에 의해 ‘미완성 결사’로 중도 해체됐지만 청정가풍을 실천했던 2년간의 결사는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 정신만은 오롯이 전해지고 있다.
결사의 산증인 수원 봉녕사 묘엄스님

“율장에 안 맞는 것은 다 버렸다”
열대여섯 나이에 결사 참여
하루종일 오로지 정진 몰두
“요즘 후학들 따라하지 못할 것”

지난 16일 수원 봉녕사에서 승가대학장 묘엄스님을 만났다. 봉암사 결사 당시 열 대여섯의 나이로 봉암사 백련암에서 참선을 했던 스님은 어느새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스님은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에 대한 기억으로 봉암사 결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승사 쌍련선원에 있을 때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영산도를 그려놓고 말씀을 나누는 걸 뒤에서 봤습니다. 커다란 종이를 펴고 해인사를 총림으로 만든다는 가정 하에 도면을 그리시더군요. 경전에 능한 운허스님과 이광수 씨에게 강원을 맡기고, 자운스님과 종수스님은 율원을, 성철스님과 청담스님은 선원을 맡아 운영하면 좋겠다는 희망들이었죠.”

해방 직후, 불교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포교란 단어가 생소했던 시절이라 불교를 알리고자 애쓰는 스님들도, 절에 찾아오는 신도들도 없었다. 스님들은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했다. “고춧가루 한 홉이라도 사판승에게 일일이 허락을 구하고 사용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수행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두 분 스님(청담, 성철스님)은 해방과 함께 출가자도 변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던 것 같습니다.”

동냥을 해서라도 영산회상을 한번 실현해보자고 결심한 스님을 따라 묘엄스님도 비구니스님 다섯 명과 함께 봉암사 백련암에 방부를 들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경전을 근거로 흐트러진 율을 바로잡아가는 과정을 체험했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선농일치를 실천했고, 보름과 그믐에 포살법회를 열었다. 때 아닌 때 먹지 않고 자지 않았다. 또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입었던 장삼을 똑같이 맞춰 비구.비구니스님 가리지 않고 나눠입었다. 중국의 총림법을 따라 외출할 때는 삿갓을 쓰고 육환장을 집었다. 비단 가사는 누에고치를 살생해서 만든 것이라 입지 않고 대신 삼색으로 염색한 괴색가사를 수했다.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기 시작한 것도 봉암사에서부터입니다. 1948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주고 그 때부터 스님을 보면 삼배를 올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스님들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뜻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나갔다. “율장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버렸습니다. 부처님이 금했던 비단가사와 목발우를 비롯해, 산신각이나 칠성각에 있던 탱화도 태웠습니다. 민속신앙이지 불교는 아니니까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라 불만도 생기고, 각 처에서 스님들이 모인 만큼 문중도 제각각이라 분열도 있을법했다. 봉암사 결사는 그러나 이런 우려를 딛고 모범으로 자리 잡아갔다. 한 철이라도 봉암사에서 보낸 스님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란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요즘 후학들은 따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때는 화장실 들어갈 때만 빼고 하루 종일 가사장삼을 수하고 지냈습니다. 대중숫자대로 지게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나무를 하고 탁발을 해 살았으니 여간 고된 것이 아니죠.”

스님은 60년이 지난 지금 봉암사 결사정신이 많이 사라진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산신각이나 칠성각 등은 모두 되살아났고, 신도들 보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급자족하며 살던 수행자의 모습도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당시와 똑같이 그저 초발심으로 돌아가 그 옛날 우리 스님들이 목청 높여 말씀하셨던 수행의 청정함과 엄격함을 되살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출처 : 불교신문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1-02-05 09:21:58 함께해요 민족문화수호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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