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백련결사   2011-02-05 (토) 09:33
최고관리자   2,385



결사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결집체로서 불교가 수용된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우 내용상·성격상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시기에나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변혁기에는 운동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결사운동은 불교가 당시의 사회에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른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개혁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자각 반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2세기 후반의 무신정변을 기점으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변동과 관련하여 기존의 보수적인 경향이 강화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으로 전개된 수선사(修禪社)·백련사(白蓮社) 등의 결사운동등이 대표적이다.

수선사 : 수선사는 지눌이 1182년(명종 12) 정월에 개경의 보제사에서 개최한 담선법회에 참석하여 승과에 합격한 것을 계기로 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 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출발된 것이다. 그 뒤 지눌은 창평의 청원사, 하가산 보문사, 팔공산 거조사, 지리산 상무주암 등지를 돌아다니며 선의 수행에 힘썼다. 특히 거조사에서는「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1190년(명종 20)에 반포함으로써 정혜결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200년(신종 3)에는 송광산 길상사로 그 근거지를 옮겼으
며, 몇 년 뒤인 1204년 최충헌정권의 불교계에 대한 시책의 일환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어 고려왕실에 의해 사액을 받아 정혜결사의 명칭을 수선사로 하였던 것이다. 그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사상적 바탕으로 삼고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선종을 중심으로)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교종을 포용하여) 선·교의 대립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정혜쌍수 : 불교 수행의 중심을 이루는 참선과 지혜를 같이 닦는것
돈오 : 인간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임을 깨달은 것.
점수 : 깨달은 후에도 수행을 지속해야 해탈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눌의 수선사는 기존의 불교계의 제반모순과 폐단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단순한 비판과 반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수선사는 1196년 최충헌이 등장한 이후 당시 무신세력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불교 교단의 중심세력으로 주목받게 되고 크게 성장한 단계는 1219년 최우(崔瑀)가 등장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최우가 수선사를 크게 부각시킨 이유는 수선사가 당시 사회에서 기존의 여타 종파에 비해 크게 호응을 받아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최우정권은 그들의 세력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당시 불교계에 대한 개편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지눌과 그를 계승한 혜심(慧諶)의 수선사를 택했던 것이다. 수선사가 서서히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게 된 사상적인 측면의 요인은 크
게 두가지로 볼수 있는데 첫째, 지눌이나 혜심은 불교의 궁극적 세계관을 선사상에서 찾았는데, 이들은 12세기 이래 고려 사상계에서 유행하던 선사상을 단순히 답습하고 계승한 것이 아니라 더욱 정치하게 종합하고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당시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변동기에 처한 독서층에게 참신한 사상체계로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둘째, 수선사는 당시 보수적인 불교계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다시 말하면 대다수 민중들의 신앙이 정토신앙임을 인식하고서 이를 수용하는 불교관을 표방했기 때문에 참담한 현실 속에 피폐되어 있던 지방사회 일반
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백련사 : 백련사는 천태종 승려인 요세에 의해 개창된 신앙결사인데, 요세는 1174년에 천태종 승려로 입문하였으며, 1185년 봄에 개경의 천태종 사찰인 고봉사에서 개최한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그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결사에 뜻을 두게 되었다. 지눌과 마찬가지로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의 견지에서 신앙결사에 뜻을 둔 요세는 1198년 가을에 동지 10여 명과 더불어 여러 지역을 유력하다가 영동산 장연사에서 처음으로 백련결사로서의 출발을 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수선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으나, 1208년 봄에 수선 이전의 천태교관으로 방향을 전환했으며, 이러한 천태교관을 이루기 위한 실천방향을 참회법과 미타정토로 인식하고, 1216년 전남 강진의 토호세력인 최표(崔彪)·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의 지원에 따라 강진 만덕산으로 주거를 옮겨 본격적으로 백련결사를 결성하
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백련사는 결성 초기에는 지방의 토호층과 이들을 지지하던 일반민들을 주요 ※단월(檀越)로 하였으나, 1220년대에는 주로 인근 지역의 지방관의 배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 뒤 1230∼40년대에는 최우를 중심으로 하여 최우와 밀착된 중앙관직자, 그리고 많은 문신관료층이 백련사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수선사와는 달리 1230년대 이후에 와서야 최우정권이 백련사의 단월로 부각된 까닭은, 당시 몽고군의 침입과 관련하여 백련사가 강력한 대몽항전을 표방한 것에서 어떤 계기가 마련된 것이 아닐까 추측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단월 : 사찰이나 승려에게 물건을 베푸는 불교 신자. 시주라고도 한다

이러한 결사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3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째는 사회계층적인 측면이다.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모순을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들이 자각·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소수의 독점에서 상대적으로 다수에 의한 공유체제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3세기의 고려사회가 처해 있던 대내적인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아울러 30여 년간에 걸친 이민족과의 항전을 치러낼 수 있는 저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상사적 측면이다. 결사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인 지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행과 교화라는 두 방향이라는 것이다. 수행은 선사상이든 천태 사상이든 출가인이 택하는 것이지만, 교화는 자신의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므로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사운동에서는 실천을 하려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철학면(교리면)의 발전이다. 당시 수선사와 백련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철학은 최고의 수준이었다는 사실이었고 단적으로 13세기 전반에 수선사가 간행한 선적(禪籍)을 보면 단순히 중국의 저술을 다시 간행한 것이 아니라 종합·정리한 것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또 백련사도 천태·법화계통의 불서를 절요(節要)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철학을 다수가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신앙적인 의도가 작용한 것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철학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신앙결사 단계에 구축한 이러한 철학면의 발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교철학의 자기화(自己化)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장경 간행

대장경이란 불교 교리를 종합편찬한 것으로써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범어의 Tripitaka를 한문번역한 말로서 세 개의 광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경장은 부처의 설법을 기록한 '경'을 담은 광주리 라는 뜻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 조항과 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어놓은 '율'을 담아놓은 광주리 라는 뜻이다. 논장은 위의 '경'과 '율'에 관하여 '해설'을 담아놓은 광주리를 말한다.

대장경은 송나라 태조때 11년에 걸쳐 만든 '북송칙판대장경'이 효시가 되었다.
초조대장경 :우리나라에서는 현종이 즉위하고 거란, 여진, 몽고족등 북방민족의 침락이 잦았다. 이에 현종은 북방오랑캐의 침략을 퇴치하기 위하여 군비를 확충함과 아울러 우선 현화사(玄化寺)라는 절을 창건하여 부처의 은덕을 얻고 이어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대장경판을 새겨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려고 했다.
현종은 수입한 수입한 칙판대장경을 바탕으로 불경을 새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시작한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종때 시작해서 현종 20년(1029)에 거의 완성을 보았다. 그 후에도 선종 4년(1087)까지 보완작업을 계속되었다. 이 대장경을 초조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이 초조대장경은 부인사에 보관해 오다가 몽고 2차 침입때 불타 버렸다.

속장경 : 초조대장경을 현종.선종대에 걸쳐 완성한 후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고려조정에서는 문종때 대각국사인 의천(義天, 1055-1101)에 명하여 새로운 형식의 대장경 간행을 시도하였다. 북송칙판대장경을 모태로 한 초조대장경의 경, 율, 론 삼장에 만족하지 않고 이의 주석서나 연구서 라고 할 수 있는 장소(章疏)들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이에 의천은 문종 27년(1073)에서 선종 7년(1090)까지 25여년 간에 걸쳐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의 송.요나라까지 광범위하게 장소를 수집하였다. 특히 선종 2년(1085)에는 직접 송나라에 들어가서 화엄대불사의론(華嚴大佛思議論)등 3천여권을 수집하기도 하였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수집한 자료을 하나하나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것을 속장경이라 부른다. 그러나 속장경 또한 몽고 2차 침입때 초조대장경과 함께 불타버렸다.

고려대장경 : 1, 2차 몽고침략 이후에도 1254년의 7차에 이르는 몽고군의 침략을 계속 받으면서 국토는 몽고군의 말발꿉에 유린되고 처참한 서민의 삶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을 즈음 최이(崔怡)를 비롯한 고려의 세력가들은 몽고군의 퇴치를 부처의 힘에 의존하려고 결심하였다. 마침 현종이 초조대장경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간 과거의 예를 보아 정성껏 대장경을 간행하면 포악한 몽고군도 스스로 물러가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에 강화도 섬에서 고종은 재위 24년째인 1237년 수년동안 준비하여 오든 대장경의 각판을 몽고군 퇴치를 위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이후 고종38년(1251)까지 장장 16년이란 세월에 걸쳐 8만여장이나 되는 고려대장경판을 완성했다
이 고려 대장경은 81,258매나 되는 수효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불린다. 아울러 고려대장경의 경종류는 1,511종이며, 권수는 6,802권, 총 글자수는 약 5천 2백만여 자이다. 주로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종류의 나무로 만들어 졌다. 다른 대장경에 비해 오자가 거의 없는 정밀성과 글자체의 아름다움, 내용의 정확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백성들의 단합을 꾀하여 항몽 투쟁을 계속하고자 한 정치적 목적이 결부되어 이룩된 사업으로서, 고려인들의 높은 문화 의식과 민족 의식이 바탕이 되어 가능했던 것이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1-02-05 09:47:20 함께해요 민족문화수호에서 복사 됨]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Me2Day로 보내기 게시글을 요즘으로 보내기 게시글을 구글로 북마크 하기 게시글을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

2011년 10월 5일 수도권불교활성화 공개토론회 자료 
봉암사 결사